희미하게 보이는 얼굴이 있었다. 건조한 눈, 단정한 목선, 담담한 목소리. 기억을 더듬어내는 순간 들려오는 셔터음. 시야가 단숨에 넓어졌다. 윤시원 씨.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들어 올린 고개. 아. 짧은소리와 함께 벌어진 입술. 저에게 몰려있는 시선들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복귀 후의 첫 일정. 아직 카메라의 앞이었다. 멀리 보이는 매니저의 표정에 불안이 가득했다.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얕게 숨을 뱉어내고 표정을 가다듬는다. 플래시가 터지고 셔터음이 들리는 그 찰나의 순간에 처음으로 흐트러진 집중, 그것을 지적당한 것이 당혹스러웠다. 지금껏 해본 적 없던 실수였기에. 시원 씨도 사람이었네. 가벼운 목소리로 분위기를 풀어내려는 작가를 향해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쉴 새 없이 터지는 섬광 속에서 다시금 떠오르는 얼굴을 생각한다. 그리고 불빛이 화려하던 선상 위를.
무어라고 말을 걸었던가. 일정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떠올린 시간에 한숨이 흘렀다. 크루즈의 위에서 자신은 분명 지쳐있었고, 지루함을 느꼈다. 그럼에도 하선하던 때에 유쾌하다고 여길 수 있었던 이유가 당신에게 있었음을 왜 이제서야 깨달았을까. 한번 떠올리기 시작한 기억은 멈추지 않고 재생되었다. 선상에서 당신과 나누었던 대화는 자신에게서 비롯된 일방적인 것이었고, 그마저도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당신은 저에게 나쁘지 않은 술 상대였기에 거기에 얕은 관심이 닿은 것은 필연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관심이 집요한 시선으로 변질하는 것은 순식간이었고, 거기에 대해서는 사과해야만 했다. 당신에게 자신은 상대하기 까다로운 손님이었을 테니까.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는 말은 위험합니다. 그렇게 당신에게 책임을 미루며 억지로 붙잡았던 때를 또렷하게 기억했다. 그리고 마지막의 순간, 작별인사처럼 맞잡았던 손도. 주고받았던 말도. 모두.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뒤늦게 손바닥이 뜨거워지는 착각이 들었다. 속눈썹을 깜빡이고 건조한 손끝을 문지른다. 너무 늦은 깨달음이었다. 그때 했던 말처럼 우리는 배에서 내리면 만날 일 없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굳게 다 물렸던 입술 새로 한숨이 흘렀다. 장난과도 같은 변덕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당신도 그렇게 느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느낄 수 밖에 없었을 것이었다. 답지 않게 가볍게 굴었고, 집요하게 붙잡았다. 자신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그 모습에 위화감을 느낄 수 있을 만큼이나 낯선 행동들을 반복했다. 그 반복되는 행위 중에 당신에게 가벼이 굴었던 것은 제 실수였다. 기억을 되새김질하는 동안 예상하지 못한 것은 장난이라 치부했던 그 순간들에, 저조차도 깨닫지 못했던 그 시간에, 제 진심이 섞여 나오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보고 싶어서요. 그 한마디는 진심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제 행동들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매니저의 눈초리를 무시하며 창밖으로 돌렸던 시선. 그 끝에 보였던 당신의 모습. 급하게 차를 세우고 카페 테라스에 앉은 당신에게 향했던 것은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술이라도 한잔 하겠느냐고 권유했던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성급한 행동이었고 그 이후에는 전부 제 욕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 있다. 당신은 쉽게 거절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부탁 하나 해도 됩니까. 배 위에서처럼 강요한다면 받아줄지도 모른다는 안이한 생각이 남아있던 것은 사실이었다. 저랑 만나는 게 어떻습니까. 생각을 제대로 갈무리하기도 전에 뱉어냈던 문장. 그렇다고 해서 가벼운 마음은 아니었다. 이렇게 가끔 술도 마시고, 손도 잡고. 그저 다급했을 뿐이었다. 파도에 묻힐 거라는 당신의 말처럼 삽시간에 바다 아래로 가라앉게 될까 봐. 갑판에서 보았던 새카만 밤바다는 파도가 치지 않는 것처럼 고요했으나, 실상을 그렇지 않은 것처럼. 당신의 안에도 그런 파도가 치고 있다면, 부디 그날 밤에는 멎기를 바랬다. 당신한테 관심 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차재윤 씨. 내가 하는 말이 당신에게 제대로 들릴 수 있게.
저를 직접 만나본 이들이라면 대부분이 아는 것처럼 자신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싫어하는 쪽에 가까웠다.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고 바라는 그런 이들을 지겨워했고,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눈에 보이는 호감을 표시하는 치들을 경멸했다. 우스운 것은 저가 경멸하고 지겨워하는 그들은 모두 제 직업에서 비롯된 사람들이었고, 제 직업은 그네들이 있기에 유지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제게 호의를 표시하는 이들을 감사하게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 비록 그 순간은 짧았을지라도. 본래부터도 그리 넓지 않았던 인간관계는 연예계로 들어온 뒤 더욱 좁아지고 틀어졌다. 가장 가까워야 할 매니저도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바뀌게 하는 것이 일상이었고, 계약 기간이 한참 남은 소속사와의 소송도 연례행사처럼 이뤄지는 것이었다. 곁에 남은 사람은 아무것도 주고받지 않아도 되는 혈육과 오랜 시간을 알아온 몇 안 되는 사람뿐이었다. 그래서 당신을 편하다 여겼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내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으니까.
불가능한 완벽을 바라는 이들이 있었다. 그것을 꾸며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여겼던 과거가 있었다. 그 시간이 겹겹이 쌓여 지금을 만들었다. 연기에 불과했던 것들이 흐트러져서는 안 된다는 강박이 되어 제게 따라붙었다. 그것에서 벗어나 쉴 수 있는 장소는 유일하게 제 침실이었다. 침실은 오롯이 저 혼자만의 공간이었다. 비록 수면을 위해 누웠던 침대에서 침몰하는듯한 감각을 느껴 잠을 설쳤을지라도,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 느끼는 안정은 다른 휴양에 비할 것이 못되었다. 그곳에 당신을 처음 들였던 순간, 놀란듯한 반응을 보이던 당신만큼 나 또한 놀랐었다. 당신이 제 공간에 있음에도 편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에. 그 감각을 더 오래 느끼고 싶었다.
이유를 찾고 있었다. 만난 지 한 계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 묻던 당신에게 할 대답을, 그 질문을 듣기 전부터 찾고 있었다. 호의도 적의도 표시하지 않던 표정이,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어 보이던 행동이, 때마침 취향에 들어맞았던 겉모습이. 하나씩 이유를 찾아 붙였다. 그렇게 찾아낸 것들은 당신과 지내는 시간이 쌓일수록 부질없는 것이 되었다. 저를 향해 보기 좋게 웃어주는 표정이 좋았고, 지금이 아닌 마지막의 순간을 부탁하는 모습에 애가 닳았다. 원한다면 핑계를 만들어 줄 수도 있었고, 필요하다면 시간을 두어 기다리는 것도 할 수 있었다. 당신이 나를 욕심 내주었으면 했다. 내가 당신에게 욕심내고 무너지듯이.
잠들어있는 당신이 눈을 뜨고 일어났을 때 눈치챈 사실이 있었다. 나는 당신이 내게 호의적인 시선을 보여주기 전부터, 당신의 눈을 좋아했다는걸.
제게 닿았던 네 시선을 붙잡아 두고 싶었다. 다른 곳으로 향하지 않게, 저를 똑바르게 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바램처럼 눈을 마주하는 순간, 그 어느때 보다 기쁘고 당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음을.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냥 당신이라는 사람이 좋았습니다.
운명이라는 유치한 이유를 붙여도 좋고, 첫눈에 반했다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로 들려도 좋습니다.
차재윤 씨, 당신을 누구보다도 원하고 있어요.
다시 한 번 더 물어볼게요. 저와 만나주시겠습니까.